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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판의 향기: 문서를 베껴 쓰던 사람들

by 여행 짐꾼 2025. 9. 8.

지금은 버튼 한 번이면 수십 장의 문서를 복사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한때는 글자 하나하나를 직접 써야 했고,
복사 한 장조차 사람의 손과 정성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등사판(상륙판)이라는 도구와, 그 도구를 능숙하게 다뤘던 문서 필경인들이 있었죠.
그들은 기계 대신 손끝으로, 잉크 대신 땀으로 문서를 복제해내던 조용한 기록자들이었습니다.

문서를 베껴 쓰던 사람들
문서를 베껴 쓰던 사람들

 

1. 등사판이란 무엇인가 – 손으로 복제하던 시대의 복사 기술

‘등사판’ 혹은 ‘상륙판’이라는 단어는 요즘 세대에게는 생소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복사기나 프린터가 보급되기 전, 문서를 여러 부 복제할 때 사용하던 수동 복사 도구입니다.

등사판의 원리는 간단하지만 섬세했습니다.
먼저 특수한 왁스 종이(등사 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써서 '원판'을 만들고,
이 원판을 잉크 롤러가 달린 기계에 끼워 종이를 한 장씩 밀어넣어 인쇄하는 방식입니다.
글씨를 쓴 순간이 곧 출판이 되는 셈이었기에, 오타는 곧 재작업을 의미했죠.

등사 작업 과정

원고 필사: 타자기나 손글씨로 등사 원지에 오타 없이 작성

판 고정: 원판을 롤러 기계에 조심스럽게 고정

잉크 도포: 등사 잉크를 적당히 붓고, 손잡이를 돌려 복사

건조 및 배포: 번지지 않도록 신속하게 말림

등사판 특유의 향기, 바로 잉크와 왁스 종이에서 풍겨 나오던 그 냄새는
학교, 관공서, 군부대, 종교 단체 어디에서나 익숙하게 퍼졌던 향이었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그 냄새만 맡아도 ‘무언가 중요한 소식이 복사되고 있구나’ 하는 직감이 있었죠.

 

2. 문서를 베껴 쓰던 사람들 – 기록을 지킨 조용한 노동자들

등사판의 진짜 주인공은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를 다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잉크 묻은 손으로 문서를 만들었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집중해서 필사하거나 타자기로 원고를 쳐냈습니다.

특히 교육 현장, 군부대, 교회, 관공서에서는 이 작업이 일상처럼 반복되었고,
이 작업을 도맡아 하던 사람들은 대개 문서 담당 직원, 조교, 행정원, 혹은 학생 대표들이었죠.

그들의 하루는 어땠을까?

실수 없는 필사를 위해 등사 원지에 글씨를 ‘얇게, 정확히’ 써야 했고

등사판을 돌릴 땐 땀이 뻘뻘 흐를 만큼 반복적인 육체노동이었으며

수백 부를 복사해야 할 때는 팔이 아파 손을 바꿔가며 작업했으며

복사된 종이가 삐뚤어졌거나 번지면 “다시 처음부터”라는 악몽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없이, 묵묵히 그 작업을 해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서 한 장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안내였고, 정보였고, 교육이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신문의 내부 초안, 학생회 회의록, 학급 통신문도 이 방식으로 복사되어 배포됐고,
등사판에서 찍힌 글자에는 살아 있는 기록의 공기가 묻어 있었습니다.

 

3. 디지털 이전의 손끝 – 기술은 사라져도 감성은 남는다

1980년대 후반, 복사기와 팩스가 보급되면서
등사판과 그 작업을 하던 사람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90년대 이후에는 잉크 냄새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늘었고,
이제는 등사판 자체가 ‘전시관’에 가야 볼 수 있는 유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등사판의 기억은
단순한 도구의 기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듯한 글씨를 쓰기 위해 집중했던 방과 후 교실의 풍경

노란 잉크가 번지지 않게 종이를 살살 들고 다니던 학생회의 일원

회의 시작 전 몰래 복사한 자료를 나눠주던 회사 막내의 땀방울
이런 작고 소중한 노동의 순간과 함께 남아 있습니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기계는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의 온도와 정성은 여전히 가치를 가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그 잉크 냄새가 그리워집니다.

 

마무리하며 – 종이 위에 찍힌 진심

잉크 냄새가 났고,
팔은 아팠으며,
작은 오타 하나에 숨이 멎던 시절.

하지만 그 시대의 문서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찍어낸 기록의 흔적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만든 사람들은, 누군가를 위해 보이지 않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했던 조용한 영웅들이었습니다.

혹시 지금, 오래된 종이에서
그 시절 등사판의 향기를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그 냄새는 기억 속에서
다시금 선명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