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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에서 워드까지: 손끝으로 살아낸 나날들

by 여행 짐꾼 2025. 9. 5.

‘딸깍딸깍’
지금은 사라진, 그러나 한때 수많은 사무실을 울리던 리듬.
지금이야 키보드에 손만 올려도 자동 저장되고 맞춤법까지 수정해주는 시대지만,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도 온전히 ‘손끝의 기술에 의존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너무 쉽게 누르고 있는 이 ‘키보드’의 조상,
그리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타자수들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타자기에서 워드까지: 손끝으로 살아낸 나날들
타자기에서 워드까지: 손끝으로 살아낸 나날들

1. 타자수의 하루 – 속도와 정확성의 세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무실에는 타자기의 경쾌한 소리가 배경음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타자수라는 직업이 있었죠.

타자수는 단순히 타자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정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 정확도 100%, 분당 400타 이상을 자랑하던
‘손끝의 장인’들이었어요.

타자수의 핵심 스킬

속도: 분당 최소 300타 이상, 빠르면 600타 이상까지

정확성: 오타를 줄이기 위해 ‘백스페이스’도 없는 상황에서 집중력 요구

포맷 지식: 각종 공문서, 계약서, 보고서의 형식 암기

필기 해독력: 타자수는 손으로 쓴 초안을 해석해 글로 옮기는 일도 담당했죠

오타가 나면?
한 줄 전체를 다시 쳐야 했습니다.
수정액(화이트)을 사용하면 문서의 신뢰도가 떨어졌고, 실수가 많으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죠.

특히 관공서, 신문사, 출판사 등에서는 중요한 문서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타이핑하는 일이 많았기에,
타자수들은 늘 긴장 속에서 일했습니다.
한 줄마다, 한 문단마다 땀이 묻어 있는 정확성의 노동이었습니다.

 

 

2. 타자기, 그리고 여성의 노동 – 조용한 생계의 역사

타자수는 당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사무직 중 하나였습니다.
결혼 전 혹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
손재주가 좋다는 이유로 타자 학원에 등록해 타자 기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죠.

타자학원은 1980년대에 수많은 여성들로 붐볐고,
졸업 후엔 공공기관, 신문사, 기업 비서실 등에서 일자리를 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직업은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업무 속에 성실함으로 살아남는 구조였죠.
하지만 동시에 저임금, 단조로운 노동, 직업의 불안정성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수라는 직업은 많은 여성들에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기술이었고,
가정에 도움이 되는 작지만 중요한 직업적 자부심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여성은 결혼하면 퇴직해야 한다는 관습이 강했던 시대에,
짧은 시간 안에 기술을 익혀 취업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직종 중 하나였던 거죠.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말합니다.
나는 내 손끝으로 살아냈다고.

 

 

3. 디지털 시대, 타자수의 흔적을 지우다

1980년대 후반, 전자 타자기가 등장하고
1990년대에 접어들며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사무실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타자수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워드의 세계에서는
오타는 백스페이스 하나로 지워지고,
서식은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정리되며,
작업 시간은 단축되었고,
더 이상 타자수는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죠.

사무직의 자동화와 디지털화는
인간의 기술과 감각, 그리고 집중력에 의존하던 타자수라는 직업을 급속도로 역사 속으로 밀어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타자수’라는 단어는 시험지 지문에나 나오는 옛말이 되었고,
타자기 소리는 복고풍 BGM 속에서나 등장하는 사운드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타자수들은
글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지금 우리가 너무 쉽게 다루고 있는 ‘텍스트’라는 결과물을
진심과 땀으로 찍어낸 장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토록 정돈된 문서와 기록을
쉽게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무리하며 – 잉크 리본에 묻은 삶

“딸깍딸깍딸깍— 철컥.”

잉크 리본이 종이에 눌리고, 활자가 박히던 그 소리.
한 글자 한 글자가 타자수의 리듬이었고,
그 리듬 위에서 삶을 일구던 손끝의 역사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키보드 하나로 수천 글자를 순식간에 쓰지만,
과거 누군가는 하루 종일 손끝으로 세상을 옮기고, 의미를 새기고,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릴 적, 엄마 책상 위에 놓여있던 타자기를 기억하시나요?

그렇다면, 잊지 말아주세요.
‘워드’라는 편리함의 뒤에는
분명 누군가의 고단한 손끝이 존재했음을.